구유 앞에서/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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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봉출
댓글 0건 조회 1,708회 작성일 09-12-2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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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 앞에서

하늘에서 땅까지
참으로 먼 길을 걸어 내려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사랑으로 좁히러 오셨습니다.

예수 아기시여
마리아의 몸 속에
침묵하는 말씀으로 당신이 잉태되셨을 제
인류의 희망과 기다림도 잉태되었습니다.

당신이 마리아의 태중에서 베틀레헴으로
먼길을 가셨을 제
순례하는 인류의 긴 여정도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이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숙소를 찾아 헤매실 제
인류도 방을 잃고 서 있었습니다.

추위에 몸을 떨면서
울고 싶은 마음으로 서성였습니다.

당신이 비로소 첫울음 터뜨리며
가난한 구유 위에
부요한 사랑으로 누우셨을 제
인류와 사랑으로 누우셨을 제
인류와 교회는 낳음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문이 열리고
구원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천 년이 지나고 또 천 년이 지나도록
당신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오시건만
당신을 외롭게 만든 건
정작 우리가 아니었습니까?

누우실 자리 하나 마련 못한 건
바로 우리가 아니었습니까?

죄 많은 우리를 위해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한없이 작아지신 겸손의 아기시여
우리는 오늘밤 처음인 듯 새롭게
당신을 구세주 예수라 부릅니다.

예언자의 말씀대로 탁월한 경륜가가 되실
용사이신 하느님이 되실
평화의 임금님이 되실
인류의 영원한 애인, 예수라 부릅니다.

신앙 없이는 차마 알아 들을 수 없는
놀라운 약속과 은총의 아기시여
우리의 어둠에 어서 불을 켜소서.

손님 아닌 주인으로
당신을 맞을 마음의 방에
어서 불을 켜게 하소서

돌처럼 딱딱한 마음 대신
아기의 살결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당신을 보게 하시고

욕심의 비늘 번쩍이는 어른 옷 대신
티없이 천진한 아기옷을 입고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 오늘 당신 앞에
천사는 아니어도 기쁜 노래 부릅니다.
목자는 아니어도 달려왔습니다.

삼왕은 아니어도 성령의 별을 따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예물을 들고
예까지 왔습니다.

오늘밤 당신의 탄생과 함께
온 교회가 온 인류가
당신을 기리며 태어나게 하소서

두 쪽으로 갈라져서 아픔도 많은
이 조그만 나라

길가에서 아이 낳은 여인처럼
외롭고 고달픈 우리의 모국
살얼음 딛듯 불안한 매일 속에
응어리진 상처와 한숨을
마음놓고 토해낼 수도 없는 답답한 이 겨레도

당신께 희망을 걸고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끊임없이 당신을 부르며
기도하고 일하는 한국 교회가

감사하며 걸어가는 우리 자신이 당신께 목숨을 거는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아아, 주 예수 그리스도 엠마누엘이여
사랑이신 당신 앞에
천지가 잠을 깨는 밤
당신을 닮고 싶은 영혼들이
피리처럼 떨려 오는 아름다운 밤이여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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